녹암 권철신 암브로시오 (1736~1801)
본관은 안동으로, 자(字)는 ‘기명’(旣明), 호는 ‘녹암’(鹿菴), 당호는 ‘감호’(鑒湖)입니다. 1791년의 순교자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은 그의 동생이고, 1801년의 순교 복자 권상문(權相問, 세바스티아노)은 그의 조카이며 양자였습니다.
암브로시오는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이름 있는 학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1776년을 전후로 젊은 학자들이 그의 문하에 들어와 학문을 닦게 되었으니, 1785년의 순교자 이벽(요한 세례자), 1801년의 순교 복자 홍낙민(루카)과 윤유일(바오로), 1801년의 순교자 이승훈(베드로)과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등이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습니다.
1779년 겨울, 암브로시오는 제자인 이벽 등과 함께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그 내용에 대해 토론한 뒤 천주 신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어 1784년 가을에는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자신의 집을 방문한 이벽과 함께 다시 한 번 교리에 대해 연구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같은 해 겨울에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으니, 그때는 서울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식이 거행된 직후였습니다.
이때부터 암브로시오는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지만, 드러나게 활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그는 언제나 교회의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되곤 하였습니다. 게다가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우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체포되어 모진 형벌 끝에 유배형의 판결을 받고 길을 떠나던 도중에 사망하자, 문밖출입은 물론 신자들과의 교류도 삼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암브로시오는 1795년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자신의 집을 방문하자, 양자인 권상문과 함께 성사를 받고 교리에 대한 강론도 들었습니다.
암브로시오는 1801년의 신유박해가 발생한 직후인 3월 24일(음 2월 11일)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체포되었습니다. 이내 의금부로 압송된 그는 문초가 시작되자 시종일관 의연하게 대처하였고, 신해박해 이후로는 신자들과 상종한 일이 없다는 사실만을 되풀이하여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박해자들이 주문모 신부의 종적이나 다른 신자들과의 관계를 질문할 때면 입을 굳게 다물고 한 마디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4월 4일(음 2월 22일) 다섯 번째의 문초와 형벌 과정에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 65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