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암 이벽 요한 세례자 (1754~1785)
김대건 신부님은 1845년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에서 이벽에 대해 ‘가장 먼저 하느님을 인식한 철학자 중 가장 유명한 분’으로 표현합니다. 스승 권철신과 동료학자들이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학문의 한역 서적을 접하던 1770년대 중반 무렵, 이벽은 이미 천주교 서적을 접하고 연구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천주 교리에 관심을 가지고 스스로 이를 연구하던 가운데 광암 이벽은 1779년 겨울 천진암 강학회에 참가함으로써 서학 연구에서 신앙으로의 도약을 이루게 됩니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순교사 비망기』에서 1783년 겨울 동지사 일행으로 북경을 방문하는 이승훈의 세례를 준비한 이벽의 역할을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벽 세례자 요한은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은 후 돌아와 전해준 천주교 관련 서적을 천진암 독서처에서 공부하며 더욱 깊은 신앙에 이르게 됩니다.
이후에 이벽은 1784년 명례방 세례공동체에서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약종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내포지방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호남지방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등과 교류하여 조선교회 복음화의 중심인물이 됩니다.
1785년 봄의 어느 날 명례방 집회가 형조의 금리들에 의해 발각되었고 그곳에 모여 있던 신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습니다. 이벽의 부친은 그를 고향으로 불러 집안에 가두고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천주교 신앙을 버리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의 신앙을 꺾을 수 없었고, 이후 계속된 가정 박해로 이벽 요한 세례자는 결국 순교하게 됩니다.